안개 속에 숨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  류시화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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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 Posted by Book Hana 2010. 12. 16. 05:44

여행자를 위한 서시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 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밭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류시화님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날이 밝았느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이 한 구절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시린 날들이 있었다.
떠나지 못한 자의 위안으로 삼으며, 이 책을 읽어가던 시간이 있었다.
97년에 이 책이 처음 나왔으니, 벌써 13년이 되었다.
새 책을 구입해 읽으니, 새삼 그때의 가슴앓이가 느껴진다.

이 책의 여행지인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문명 세상에 사는 지금,
그곳은 여전히 가보지 못한 꿈 속의 하늘 호수이다.

인도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날의 일상에 쫓겨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등짝에 지워진 삶의 무게가 좀은 가볍게 느껴지게 될 지도 모르겠다. ^^
책 이야기 | Posted by Book Hana 2009. 10. 16. 09:19

인디언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법

 아침에 눈을 뜨거나 저녁에 잠들기 전에 뭇 생명들과 그대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해 감사하라. 위대한 정령이 그대에게 준 많은 좋은 것들과, 날마다 조금씩 더 성장할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라.

 어제 그대가 한 행동과 생각을 돌아보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구하라. 다른 모든 생명체들에게 이로움이 될 일들을 찾으라.

 존중하라. 존중한다는 것은 누군가에 대해 또는 무엇인가에 대해 가치를 발견하고, 느낌을 갖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누군가의, 또는 무엇인가의 행복을 생각하고, 정중하고 사려깊게 대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대하라. 특히 어른들과 부모, 교사,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을 존경해야 한다. 누구도 당신에게 무시당해선 안 된다. 독약을 피하듯 다른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허락이나 서로의 이해 없이는 다른 사람의 것에 손대지 말라. 특히 성스럽게 여기는 물건을. 모든 이의 사생활을 존중하라.
누군가의 고요한 시간이나 개인적인 공간을 방해하지 말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는 지나가지 말라. 누군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끼어들지 말라.

 언제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라. 특히 어른들이나 처음 대하는 사람. 특별히 존경심을 표시해야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가 그 자리에 있든 없든, 절대로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말라.

 대지와 대지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의 어머니로 여기라. 광물 세계, 식물 세계, 동물 세계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어머니 대지를 더럽히는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 지혜를 갖고 어머니 대지를 보호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가진 믿음과 종교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라.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으라. 설령 그가 하는 말이 무가치하게 느껴질지라도, 마음을 담아서 들으라.

 부족 회의에 모인 사람들의 지혜를 존중하라. 부족 회의에서 그대가 한 가지 생각을 내놓으면, 이미 그것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부족 전체의 것이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듣고, 그대의 견해만을 내세워선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진실되고 좋은 것일 때, 그것이 그대가 내놓은 생각과 많이 다를지라도 기꺼이 그것을 지지해야 한다. 서로 다른 의견들이 만날 때 진리의 불꽃이 일어난다.

 일단 부족 회의에서 어떤 것이 결정되면, 뒤에 가서 그것에 대해 반대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결정이 내려졌다면, 적당한 시기가 되었을 때 모두가 그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한결같이 진실되어야 한다.
 
 그대의 집에 찾아온 손님을 언제나 반갑고 진실되게 대하라. 그대가 가진 가장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가장 좋은 담요와 가장 좋은 공간을 내주어라.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인류 전체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인류 전체를 존중하는 것과 같다.

 낯선 사람과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한 가족처럼 사랑으로 맞이하라.

 세상의 모든 종족들과 부족들은 하나의 들판에서 피어난 서로 다른 색깔의 꽃들과 같다. 모두가 아름답다. 위대한 정령의 자식들로서 모두가 존중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고, 가족과 공동체와 국가와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가장 큰 목적이다. 그대 자신을 개인적인 일로만 채우느라 가장 중요한 대화를 잊어선 안 된다. 진정한 행복은 남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칠 때 찾아온다.

 모든 일에 있어 절제와 조화를 중요시 여기라. 삶에서 그대를 행복으로 이끄는 것과, 그대를 파괴하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삶의 지혜다.

 그대의 마음이 안내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소리를 따르라. 여러 가지 형태로 찾아오는 해답에 마음을 열어 두라. 해답은 기도를 통해, 꿈을 통해, 또는 홀로 고요히 있는 시간을 통해서도 올 수 있다. 지혜로운 어른들과 친구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도 그것은 찾아온다.

          ---- 인디언 추장들의 연설 모음집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중에서



---1994년 10월호 <인터트라이벌 타임스>에 실린 이 글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도덕관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문장 한 문장을 적어 보았습니다. 
오늘 저는 '단체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졌다면 반대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잘못된 결정이 내려졌다면 적당한 시기에 모두가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말이 크게 다가옵니다. 
모두가 깨닫고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기! 
참으로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말이지만, 그래야 또 진정으로 모든 사람의 공감을 얻게 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