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경진년과 신사년 겨울의 일이다. 내가 거처하던 작은 띳집이 몹시 추웠다.
입김을 불면 성에가 되곤 해, 이불깃에서 버석버석하는 소리가 났다.
내 게으른 성품으로도 한밤중에 일어나 창졸간에 <한서> 한 질을 가지고 이불 위에 죽 늘어놓아,
조금이나마 추위의 위세를 누그러뜨렷다.
이것이 아니었더라면 거의 얼어죽은 진사도(송나라때의 시인)의 귀신이 될 뻔 하였다.

간밤에도 집 서북편 모서리로 매서운 바람이 쏘듯이 들어와 등불이 몹시 다급하게 흔들렸다.
한동안 생각하다가 <논어> 한 권을 뽑아 세워 바람을 막고는 혼자서 그 경제의 수단을 뽐내었다.
옛사람이 갈대꽃으로 이불을 만든 것은 기이함을 좋아함이라 하겠거니와,
또 금은으로 새와 짐승의 상서로운 상징을 새겨 병풍으로 만드는 것은 너무 사치스러워 족해 부러워할 것이 못 된다.
어찌 내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이 창졸간에 한 것임에도 반드시 경사 (經史)를 가지고 한 것만 같겠는가?
또한 한나라 왕장이 쇠덕석을 덮고 누웠던 것이나, 두보가 말 안장을 깔고 잔 것보다야 낫다 할 것이다.
을유년 겨울  11월 28일에 적다.  - < 이목구심서 耳目口心書> 중에서




...이덕무! 그를 생각하면 나는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후리후리한 큰 키에 비쩍 마른 몸매.
퀭하니 뚫린 그러나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
추운 겨울 찬 구들에서 홑이불만 덮고 잠을 자다가
<논어>를 병풍 삼고, <한서>를 물고기 비늘처럼
잇대어 덮고서야 겨우 얼어죽기를 면했던 사람.

글을 읽다 보면 얼음이 꽁꽁 어는 추운 방에서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글씨를 써나가던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온다.
온 몸으로 그 시대를 고민했던이,
폐병과 영양실조로 어머니와 누이를 먼저 보내는 처절한 궁핍 속에서도
제 가는 길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던 사람.
세상에 그만큼 생을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 있을까?

그가 남긴 글은 아름답고 슬프다....  

< 이 책을 편역한 정민 교수의 글 중에서>



                  안개 속에 숨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  류시화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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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 Posted by Book Hana 2011. 1. 25. 01:32

김매듯이... (박완서 선생님을 추모하며)




돌이켜보니 김매듯이 살아왔다.
때로는 호미자루 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후비적후비적 김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거둔 게 아무리 보잘 것 없다고 해도
늘 내 안팎에는 김맬 터전이 있어왔다는 걸
큰 복으로 알고 있다.

내 나이에 6자가 들어 있을 때까지만 해도
촌철살인의 언어를 꿈꿨지만
요즈음 들어 나도 모르게
어질고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글을 소망하게 되었다.
아마도 삶을 무사히 다해간다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날마다 나에게 가슴 울렁거리는 경탄과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자연의 질서와
그 안에 깃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를
읽는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 박완서 산문집 <호미>  책 머리글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작고 소식을  들으며,
나는 박경리 선생님을 동시에 떠올렸다.

그리고,
' 이렇게 세월은 처연하게 가고 있구나...
어떤 감정도 실지 않고 흘러가고야 마는구나...' 하는 허망함!

... 칠십 년은 끔찍하게 긴 세월이다.
그러나 건져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은 허망감을
시냇물 소리가 다독거려준다.
그 물소리는 마치 모든 건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성직자의 설교보다도
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준다. ...<본문 중에서>



그분을 떠올리면
늘 소박한 웃음과 평온함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그분의 진짜 치열한 삶과 무관하게...

일제 시대 이후 광복과
전쟁기의 고단한 우리 민족의 삶을
마치 할머니가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말하듯이 
가만가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시던
또 한 분이 우리곁을 떠나셨다.

영원한 안식을 축원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