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 Posted by Book Hana 2010. 12. 16. 05:44

여행자를 위한 서시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 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밭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류시화님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날이 밝았느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이 한 구절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시린 날들이 있었다.
떠나지 못한 자의 위안으로 삼으며, 이 책을 읽어가던 시간이 있었다.
97년에 이 책이 처음 나왔으니, 벌써 13년이 되었다.
새 책을 구입해 읽으니, 새삼 그때의 가슴앓이가 느껴진다.

이 책의 여행지인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문명 세상에 사는 지금,
그곳은 여전히 가보지 못한 꿈 속의 하늘 호수이다.

인도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날의 일상에 쫓겨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등짝에 지워진 삶의 무게가 좀은 가볍게 느껴지게 될 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