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 Posted by Book Hana 2012. 9. 12. 06:45

흑산

 

이 소설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와 관련하여 그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과 민초들의 삶을 담고 있다.

내용은 크게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정약종, 유배형을 받은 정약전과  정약용 그리고 그  형제들의 조카 사위인 황사영과 같은 지식인의 삶과 단지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했던 뱃사공, 마부, 주모 등등의 민초들의 삶과 생각들이 크게 대비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흑산도로 유배되어 간 정약전이 이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 바다는 이 세상 모든 물의 끝이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는데, 보이지 않는 그 너머에 있다는 흑산도는 믿기지 않았다. 바다는 인간이나 세상의 환란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어 보였다. 밀고 써는 파도가 억겁의 시간을 철썩거렸으나,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스치고 지나간 시간의 자취는 거기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다는 가득 차고 또 비어 있었다.

……저것이 바다로구나, 저 막막한 것이, 저 디딜 수 없는 것이…….

……마음은 본래 빈 것이어서 외물에 반응해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하니, 바다에도 사람의 마음이 포개지는 것인가. "

 

천주학쟁이라는 이유로 심문을 받아 만신창이가 되어, 무안포구에서  유배지인 흑산도행 배를 기다리는 정약전.

세상사의 온갖 아귀다툼과는 전혀 무관한 듯이 철썩거리는 바다 앞에 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잘 대비되어 나타난다. 

 

정약전하면 흑산도에 유배되어 그곳의 물고기의 생태를 쓴 '자산어보'를 남긴 실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소설을 통하여 시대의 큰 흐름 속에 휩쓸려 원하지 않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한 유학자의 허약함과 비루함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을 끈질김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약전은 '흑산'의 '검을 흑'은 너무나 무서우므로, 대신 '검을 자'를 써서 '자산'으로 대신하겠다고 창대에게 말하는데, 이'자'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라는 뜻 외에도 '지금,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 사는 섬은 곧 자산이다."라고 말한다.

그 의미는 '검을 흑'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깊은 어둠(수렁)이지만,

'검을 자' 속에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이 있으니, 그래도 삶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다가 죽은 유자儒者의 삶과 꿈, 희망과 좌절을 생각했다. 그 바다의 넓이와 거리가 내 생각을 가로막았고 나는 그 격절의 벽에 내 말들을 쏘아댔다. 새로운 삶을 증언하면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나 돌아서서 현세의 자리로 돌아온 자들이나, 누구도 삶을 단념할 수는 없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  - 작가의 '후기' 중에서

 

작가 특유의 인물들의 행동을 표현하는 시니컬한 말투와 함께

이 글을 쓰는 내내 흑산도, 남양 성모성지, 배론성지 같은 사학 죄인들의 유배지나 피 흘린 자리를 찾아 돌아다녔을 그 분주한 발걸음이 눈에 선하다.

작가의 손으로 되살아나 그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내는 인간들의 나약함과 치졸함 그리고 또 그 이상으로  어떤 고통도 감내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며, 한편으로는  가슴 졸이기도 하고  한숨짓기도 했던 시간이 새삼 가슴앓이로 남는다.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세계일주로 경제를 배웠다  (0) 2012.12.21
광해, 왕이 된 남자  (0) 2012.11.05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0) 2012.07.25
독서 예찬  (0) 2012.07.11
은교  (0) 2012.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