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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 Posted by Book Hana 2009. 6. 2. 22:58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유고 시집

1926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을 발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1969년 6월 부터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25년만인 1994년 완성하다. 
시집으로는 <못 떠나는 배>, <도시의 고양이들>, <우리들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2008년 5월 5일 별세, 통영시 신전리 미륵산 기슭에 안장되다.


     산다는 것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들면
     바쁜 듯이 뜰 안을 왔다 갔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고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인명재천
     나를 달래는 데
     그보다 생광스런 말이 또 있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 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이 책에는 39 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에는 산골에서 칩거해 사는 이의 외로움과 소박한 삶, 매일의 노동이 묻어나는 흙냄새가 절절이 배어 있다.
자신의 출생, 어머니에 대한 기억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한 편의 짧은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산다는 것'이란 이 시에서 마지막 연이 참 눈물겹다.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지금 놓여 있는 나의 삶이 너무 힘겨웁다고 느낄 때는 그저 진저리만 치게 된다. 또 그 순간은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어느 날 나도 나이 들어 힘든 시절을 되돌아 보며 '그래도 그때가 참 좋은 시절이었지'라고 회상하게 될까?
젊은 날에는 당연히 안 보이는 것인가?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이른 봄/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무섭기도 했지만/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나를 지탱해 주었고/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모진 세월가고/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이란 시다.
작가의 서릿발같은 삶이 느껴지는 시다. 차가운 밤에 홀로 책상에 앉아 원고지를 메워 나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홀로 앉아 그 긴장감을 내내 견지하며 살아온 삶! 결코 녹녹할 수 없는 삶이다. 그래서 모진 세월가고...이제 늙어서 편안하다고 한 것일까?

 내게 있어 '박경리' 하면, 몇 가지 장면이 연상된다.
학창 시절 '김약국의 딸들'에 빠져 들던 내 모습과 '토지'가 드라마 되었을 때 주인공 서희의 꼿꼿한 모습.  그리고 간혹 잡지에 인터뷰 기사라도 실리면 항상 먼 곳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작가의 모습이다. 그 모습이 참 자연스러워서 당당하게 느껴졌고, 오만한 서희의 모습도 연상되었다. 

이제 또 한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우리들 각자는 누구에게 어떤 이미지로 남게 될까?